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여행지에서 보는 풍경도, 마주하는 인물의 생애도 다르게 다가온다. 젊은 시절에는 ‘꿈처럼 예쁜 나라’로만 여겼던 모나코가, 지금은 ‘어떤 여자의 선택이 만든 나라’처럼 보인다.
그레이스 켈리.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영화배우이자 모나코 왕비,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와 닮은 한 명의 ‘여자’였다.
동화 속 나라에 숨겨진 이야기
니스에서 기차로 20분 남짓, 누구나 한 번쯤은 ‘여기가 진짜 나라야?’ 하고 묻게 된다. 도시국가라기보다는 정원에 가까운 이곳. 샴페인 같은 햇살, 장난감처럼 반짝이는 요트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촘촘히 놓인 고급 아파트. 마치 잘 연출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돈된 풍경이다.
그리고 이 영화 같은 도시의 주연이 바로 그레이스 켈리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모나코는 지금의 모나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여행길에 하루를 머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은막의 스타에서 진짜 왕비로
그레이스 켈리를 처음 본 건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였다. 「Rear Window」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단정하면서도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절제된 우아함, 허락되지 않은 열정. 그녀는 늘 어떤 경계선 위에 있었다. 스타였지만 스캔들은 거의 없었고, 아름다웠지만 차분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1956년 돌연 영화계를 떠나 모나코의 레니에 대공과 결혼했다.
모나코 공주가 된다는 건, 모두가 꿈꾸는 일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당시 언론은 그렇게 떠들었다. ‘현대판 신데렐라’, ‘왕비가 된 영화배우’, ‘헐리우드의 동화 결말’.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그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건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선택했지만, 동시에 자유를 내려놓았다. 배우로서의 경력은 중단되었고, 인터뷰도 제한되었으며, 평범한 생활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레이스 켈리’가 아니라 ‘모나코 대공비’가 되었다.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존재해야 했던 삶. 그 화려함 이면에 어떤 외로움이 있었을까.
모나코에서 찾은 그녀의 흔적
모나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녀의 흔적을 따라 다녔다. 대공궁 위의 정원에는 그녀가 즐겨 산책하던 길이 있다. 돌담을 따라 피어난 분홍빛 꽃들이 그녀의 이름처럼 조용하고도 고왔다. 왕궁 옆 작은 예배당에는 그녀와 레니에 대공이 나란히 잠들어 있다. 장례식 당시, 전 세계 수천만 명이 시청했던 중계화면 속의 그녀는, 마지막까지 우아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가까이 느낀 곳은, 왕궁도 교회도 아닌 ‘모나코 국립 오션그래픽 박물관’ 옆 벤치였다. 그곳에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웃고 있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 화장기 없는 얼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대공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간적인 순간이었다.
그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그녀가 문득 내 옆에 앉아 말할 것 같았다. “나는 잘 살았을까?”라고.
여자로서의 선택, 그리고 균형
그녀의 삶을 영화가 아니다. 대신 한 여자의 선택, 타협, 고독, 그리고 균형 감각으로 읽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간다. 어떤 이는 커리어라는 이름으로, 어떤 이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그레이스 켈리의 선택은 모나코였고, 왕비라는 역할이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그 삶을 끝까지 우아하게 견뎠다는 것이다. 이십 년 넘게 공식석상에서, 국제 자선 활동에서, 모나코의 문화행사에서,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우아함은 지금도 모나코의 골목길 곳곳에 남아있다.
여행자의 눈으로 본 모나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녀의 삶과 내 삶을 겹쳐보았다. 그레이스 켈리는 우리에게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게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다. 누구나 타협하며 산다. 중요한 건 그 타협의 방식이다.
모나코는 그녀에게 호화로운 나라가 화려한 동화가 아니라, 조용하고 단단한 삶의 터전이여야만했고 집이여야 했다. 이 도시를 걷는 여성 여행자들이 그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면, 아마 그들도 자기 안의 어떤 단단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역할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엄마, 아내, 직장인, 창작자. 그리고 때론 그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그냥 ‘여자’로 살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 모나코에서의 그레이스 켈리를 떠올리는 건 위로가 된다.
동화는 끝났지만, 그녀의 인생은 진짜였고…..
다시 동화속에 아름다운 왕비로 잊혀지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