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거리에서 세잔의 아뜰리에까지 예술가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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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세낭크수도원 Abbaye Notre-Dame de Sénanque |
프랑스 남부의 아침은 대체로 여유롭다. 햇살은 바람보다 먼저 창가를 두드리고, 오래된 돌담은 햇빛을 받아 따뜻한 색을 띤다. 그런 엑상프로방스의 아침, 우리는 렌트카에 짐을 싣고 조용히 출발했다. 목적지는 라벤더로 유명한 세낭크 수도원. 이미 수없이 사진으로 보았고, 수없이 상상해온 그 풍경을, 드디어 직접 마주하러 가는 길이다.
4년전에는 개화 시기가 아니여서 라벤더를 구경도 못하고 남프랑스를 떠났다. 너무 아쉬워 꼭 남편과 다시 올거라고 막연하게 계획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고속도로 위의 쉼표, 작지만 확실한 순간
목적지를 향해 부드럽게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불쑥 일상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주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프랑스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생각보다 잘 정돈되어 있고, 작지만 정갈하다.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가 추출되고 있었고, 계산대 옆 선반에는 작고 진한 보랏빛의 라벤더 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6월의 남프랑스는 어디를 가도 보랏빛 라벤더 기념품을 만날수 있다. 아직 세낭크는 한참 남아 있었지만, 그 향을 맡는 순간 어쩐지 이미 도착한 기분이었다. 여행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먼저 다가오곤 한다. 주차장 바닥에는 귀중품주의 문구와 차량 유리 파손주의 그림까지 평안한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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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aye Notre-Dame de Sénanque |
골짜기 안의 고요한 시간, 세낭크 수도원
도로는 점차 좁아지고, 고르드(Gordes)의 절벽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면, 세낭크 수도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그 풍경은 늘 사진으로만 보아온 장면이었지만,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순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세낭크 수도원(Abbaye Notre-Dame de Sénanque)은 1148년에 시토회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된 중세 수도원이다. 시토회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단순한 삶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자 했던 수도회다. 이 철학은 수도원의 건축에도 고스란히 스며 있다. 화려함 없는 회색 석조 건물,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창과 기둥, 그리고 조용히 흘러가는 빛…
여름 햇살 아래에서도 수도원은 냉정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듯한 그 공간에 들어선 순간, 일상의 소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걷는다는 것, 느린 호흡의 체험
세낭크 수도원은 방문객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전통적인 가이드 투어와, Histopad라는 태블릿을 활용한 자율 관람이 그것이다. 우리는 Histopad를 선택했다.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겹쳐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태블릿을 들고 회랑을 지나고, 장서실과 수도사의 침실을 거닐다 보면, 화면 위로 중세 시대의 모습이 살아난다. 수도사들이 기도하던 모습, 조용히 식사하던 장면, 글을 베껴 쓰던 정적의 순간들이 기술을 통해 되살아난다. 마치 걷는 발걸음마다 한 조각씩 그 시대의 공기가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예배당은 특히 인상 깊었다. 높은 천장은 소리를 부드럽게 반사하고, 햇살은 색 없이 맑게 들어온다.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그 공간은, 수도원이 단지 유적지가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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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aye Notre-Dame de Sénanque 세낭크수도원 |
라벤더, 계절의 정점에서 피어나는 침묵
세낭크 수도원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단연 라벤더다.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 수도원 앞 너른 들판은 라벤더로 뒤덮인다. 줄 맞춰 심어진 보랏빛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하지만 이 라벤더는 단지 보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도사들은 이 라벤더를 직접 재배하고 수확한다. 그리고 그 수확물은 수도원의 생계를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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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aye Notre-Dame de Sénanque |
라벤더가 만개하는 성수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화려하진 않지만 한그루 큰 나무와 함께 가지런한 라벤더들은 수도원처럼 정적이다. 방문객들도 소란스럽지 않다. 소란스럽지 않게 라벤더들을 배려하듯 애써 비켜 담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면 수도원 맞은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그 자리에서는 수도원과 라벤더가 함께 화면 안에 들어온다. 보랏빛 들판 위에 서 있는 회색 건물 하나. 그 자체로 완성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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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aye Notre-Dame de Sénanque |
수도사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 기념품점
방문을 마친 후, 수도원 옆의 작은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이곳에서는 수도원에서 직접 생산하거나 지역 장인과 협력해 만든 제품들이 판매된다. 라벤더 오일, 드라이 라벤더 꽃다발, 천연 비누, 꿀, 허브티, 손으로 묶은 향주머니. 무엇 하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흔적은 없다. 그것들이 지닌 정성은 물건 너머로도 느껴졌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라벤더 엽서 하나와 작은 비누를 구입했다. 그 향은 세낭크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침묵을 닮아 있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라벤더 향이 은근히 퍼졌고, 그날의 풍경은 아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방문을 준비하는 여행자에게
세낭크 수도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라벤더를 보기 위해 온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 잠시 머물러 보면, 결국 라벤더가 아닌 ‘침묵’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짧은 계절의 아름다움과 오랜 시간의 무게가 공존하는 공간. 그것이 세낭크가 주는 진짜 매력이다.
라벤더는 언젠가 지겠지만, 그곳에서 느꼈던 침묵의 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은은하게 머무른다. 언젠가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이미 돌아오는 길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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